
2025년 5월 21일, 일본을 대표하는 영화감독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대표작 *걸어도 걸어도(Still Walking)*가 다시 한 번 스크린에 오릅니다. 2008년 일본에서 개봉해 국내에는 2009년 소개된 이 영화는, 당시 크게 주목받지는 않았지만 입소문과 평단의 호평으로 서서히 재조명받아온 명작입니다. 특히 2018년 고레에다 감독이 어느 가족으로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하며 그의 전작들이 다시금 주목받기 시작했고, 그 중심에 바로 이 작품이 있습니다.
가족이라는 누구나 경험하지만 누구도 명확히 정의할 수 없는 관계 속에서 발생하는 갈등과 애증을 ‘있는 그대로’ 담아낸 이 영화는, 15년이 넘는 시간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유효한 질문들을 던집니다. "가족은 왜 함께 식탁에 앉는가", "사랑하지 않아도 가족인가", "말하지 못한 감정은 어디로 가는가"와 같은 근본적인 주제들이 영화를 관통합니다. 이번 재개봉은 단지 옛 영화를 다시 상영하는 것 이상의 의미를 지니며, 현대 사회의 단절된 가족관계 속에서 그 해답을 찾고자 하는 관객들에게 새로운 시사점을 줄 것입니다.
[고레에다: 삶과 죽음을 말하다]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1962년 일본 도쿄에서 태어나, 다큐멘터리 제작을 시작으로 영화계에 입문한 독특한 경력을 가진 감독입니다. 그의 영화에는 이러한 다큐적 시선이 깊이 녹아 있습니다. 걸어도 걸어도 역시 ‘연출’보다는 ‘관찰’에 가까운 방식으로 전개되며, 인물들을 조명하는 대신 그들이 놓인 시간과 공간을 담담히 따라갑니다. 이 영화의 배경은 단 하루, 여름날의 고향집입니다. 하지만 이 하루는 단순한 하루가 아닙니다.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의 감정들이 겹겹이 쌓여 있는 날이며, 장남 준페이의 제사를 기리는 날입니다.
고레에다는 이 영화에서 죽음 그 자체보다는 '죽음을 겪은 이후의 삶'을 더 집중적으로 보여줍니다. 특히 남겨진 사람들의 '표면적인 일상'과 '내면의 불안정성' 사이의 간극을 섬세하게 묘사합니다. 어머니는 여전히 장남을 그리워하며, 그 슬픔을 둘째 아들에게 은연중에 강요합니다. 아버지는 무뚝뚝하게 일상에 몰두하면서도 가끔씩 내비치는 상실감에 시청자는 무거움을 느끼게 됩니다. 료타는 자신이 결코 부모에게 인정받지 못했다는 감정을 안고 살아가며, 그것이 자신의 자녀에게도 투영될까 두려워합니다.
또한, 고레에다는 가족 간의 감정이 ‘대화’보다 ‘침묵’에 더 많이 담겨 있음을 보여줍니다. 무심한 듯 건네는 말 한마디, 대답 없는 시선, 일부러 피해가는 동선, 짧은 식사 시간의 정적 등이 오히려 직접적인 표현보다 더 많은 감정을 드러냅니다. 그는 사건의 발생보다 ‘감정의 잔해’에 주목하며, 이를 통해 관객이 자신의 경험을 투사할 수 있도록 공간을 마련해 줍니다. 이러한 점에서 걸어도 걸어도는 죽음의 영화가 아니라, 남겨진 삶에 대한 이야기이며, 고레에다 감독이 지닌 감정 연출의 진수가 오롯이 드러나는 작품이라 할 수 있습니다.
[가족영화로서의 정수]
가족은 인간에게 가장 가까운 공동체이자, 때로는 가장 낯선 존재입니다. 걸어도 걸어도는 이러한 양면성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영화 속 가족은 표면적으로는 평범합니다. 명절에 모여 밥을 먹고,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고, 아이들이 뛰놀고, 형제가 농담을 주고받습니다. 그러나 그 평범함 속에 켜켜이 쌓인 감정의 층위는 결코 단순하지 않습니다.
이 가족은 장남의 죽음을 중심으로 오랫동안 분열된 감정을 품고 살아갑니다. 어머니는 준페이를 기억하고 싶어 하고, 그 기억을 통해 남은 아들에게까지 간섭하려 합니다. 아버지는 권위적이고 과묵한 인물로, 자녀들과의 소통을 단절한 채 옛 방식대로 살아갑니다. 료타는 부모의 기대를 벗어나기 위해 자신만의 삶을 선택했지만, 동시에 그로 인해 생긴 거리감을 극복하지 못합니다. 그의 아내는 외부인으로서 이 가정의 긴장감을 감지하고, 아들은 그 분위기에 눌려 어른들의 표정을 읽습니다.
고레에다는 이처럼 세대 간, 구성원 간의 미묘한 정서를 디테일하게 포착해냅니다. 인물 간의 대화는 결코 길지 않지만, 대화 이면의 감정은 매우 복합적입니다. 특히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밥상’은 상징적인 장치입니다. 가족이 함께 앉아 밥을 먹는다는 행위는 공동체의 최소 단위이자, 가장 일상적인 소통의 장입니다. 그러나 그 밥상 위에는 각자의 침묵, 불편한 시선, 그리고 말하지 않은 진심이 얽혀 있습니다.
또한 이 영화는 '화해'를 강요하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가족영화가 결국 이해와 용서로 귀결되는 것과 달리, 걸어도 걸어도는 ‘화해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관계의 회복은 단번에 이루어지지 않으며, 어떤 상처는 끝내 치유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현실적인 시선을 보여줍니다. 이러한 접근 방식은 오히려 관객들에게 더 큰 위로를 줍니다. 이 영화는 가족을 이상화하지 않으면서도, 그 안에서 존재하는 애정과 그리움을 진솔하게 담아냅니다. 그것이 바로 걸어도 걸어도가 가족영화로서 갖는 깊은 울림의 이유입니다.
[감동을 남기는 연출과 메시지]
걸어도 걸어도가 남기는 감동은, 크고 명확한 사건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 같은 하루 안에 녹아든 감정의 결들이 관객에게 조용히 스며듭니다. 고레에다 감독은 이 영화에서 인물들의 감정을 설명하는 대신, 그 감정을 ‘느끼게’ 합니다. 그는 카메라를 정적인 위치에 두고, 인물들의 움직임을 따라가기보다 그들이 살아가는 공간을 먼저 보여줍니다. 인물들은 프레임 안에서 자연스럽게 살아가며, 관객은 그들의 행동과 말, 표정에서 감정을 읽어야 합니다.
특히 인상 깊은 장면은, 가족이 함께 산책을 하며 계단을 오르는 장면입니다. 별다른 대사 없이 걷는 그 장면 속에는 ‘함께 있음’의 어색함, 무거운 침묵, 그리고 말하지 않아도 전해지는 감정이 가득합니다. 또한 영화 전반에 흐르는 사운드 역시 매우 절제되어 있으며, 대부분의 장면이 자연의 소리, 식탁 위의 소음, 아이들의 목소리로 채워져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이 작품은 철저히 ‘생활의 리듬’을 중심으로 구성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메시지 면에서도 이 영화는 뚜렷한 교훈을 제시하지 않습니다. 대신 질문을 던집니다. “말하지 않은 감정은 어떻게 되는가?”, “용서는 꼭 필요할까?”, “가족이란 어떤 의미인가?” 같은 질문들이 영화 내내 관객을 따라다니게 됩니다. 관객은 각자의 경험을 바탕으로 이 질문들에 답하게 되며, 그 과정 자체가 이 영화의 진정한 감상이 됩니다.
또한 고레에다는 현대 일본 사회의 가부장적 구조와 전통적인 가족관계를 비판적으로 묘사하기도 합니다. 아버지의 권위, 어머니의 헌신, 자녀의 순종이라는 틀에서 벗어난 인물들이 등장하며, 그들이 겪는 혼란은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도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문제들입니다. 걸어도 걸어도는 이렇게 시대의 변화 속에서 가족이 어떻게 변화하고 있는지를 조용히, 그러나 명확하게 보여줍니다.
[결론: 요약 및 Call to Action]
걸어도 걸어도는 겉으로는 평범한 가족 이야기지만, 그 안에 담긴 감정의 깊이는 결코 평범하지 않습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섬세한 시선과 연출력, 그리고 배우들의 절제된 감정 표현은 이 작품을 단순한 가족영화 이상의 예술로 끌어올립니다. 2025년 재개봉은 단지 명작을 다시 보는 기회가 아니라, 오늘날의 단절된 가족관계를 다시 돌아볼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 될 것입니다.
지금 이 영화를 다시 극장에서 본다면, 처음 봤을 때와는 또 다른 감정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가족이란 무엇인가, 용서는 꼭 필요한가, 사랑이란 무엇으로 표현되는가를 고민하고 있다면, 걸어도 걸어도는 가장 조용하면서도 강력한 해답을 전해줄 것입니다. 오래된 상처를 들여다보고 싶다면, 이 작품을 다시 꺼내 보시기 바랍니다. 말하지 않은 마음들이 스크린 위에서 조용히 속삭일 것입니다.